인권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다.

황경재(정금초등학교 교사)

  내가 살아가는 원주는 강원도에서 사회, 문화, 교통의 요충지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강원도 대표 도시이다. 벌써 2년 전 이야기가 되어 버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가 전국적으로 개최될 때 도내에서는 유일하게 중, 고등학생들이 스스로 촛불 문화제를 기획, 운영해 낸 곳이기도 하다.

  우리 도는 학생 인권 조례 증진에 반대하는 단체 등의 거센 저항으로 관련 조례가 2번이나 무산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 좌절감으로 인해 다양한 학생 인권 운동이 위축될 수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탄핵 촉구 촛불 문화제뿐만 아니라 4·16 추모 행사, 학생인권 및 청소년 선거권 확대를 위한 운동, 두발 자유화 및 민주적인 학생 생활 규정 제·개정을 위한 인권 포럼 개최 등 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주축이 되어 활발히 활동하는 친구들은 사실 한 학교에서 적게는 2-3명, 많게는 10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친구들이 모여 학생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한 노력,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다른 친구들에게 전염되어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이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먹고 사는 문제에 매몰되어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어린이,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사회 변혁에 동참하려는 중, 고등학생들의 행보에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올해 초 아내가 복직을 했다. 육아휴직 후 3년 만의 복직이었다. 복직한 학교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있다고 소문이 난 중학교였다. 실제로 복직을 해보니 인권 감수성 높은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과거와는 달리 훨씬 더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속에서 색다름을 느낀다고 했다. 학생회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주체적으로 다양한 학교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한다고 했다. 체육대회도 학생들이 스스로 기획, 사회까지 볼 정도라고 하니 대단하다며 칭찬을 늘여놓기도 했다.

  약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퇴근 후 아내는 내게 불평을 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바르지 못한 행동이나 지시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직언을 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이 무례해서 기분이 나쁠 때가 상당히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권 의식이 높아진 점에 대해서는 분명 칭찬을 할 만하나 본인들이 행동하는 모습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만 ‘인권’을 들먹이는 모습에 지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인권 의식이 전무하던 상황에서 인권에 대한 의식이 조금씩 피어나고, 퍼져가는 상황 속에서 생기는 일종의 과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는 늘 홍역을 치러 왔고 치루고 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 긴 시간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그럼에도 분명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제 우리나라는 가난과 굶주림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고, 폭력과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거의 해방되었듯이 말이다.

  학생들은 ‘인권’을 잘 모른다.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사실 교사들도, 어른들도 인권을 잘 모른다. 인권에 관심이 있어 공부하는 사람들조차 가끔 헷갈리는 것이 인권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런 과도기적 현상을 당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의 권리가 곧 인권이라는 오개념을 갖게 된다. 그런데 권리는 인권이 아니다. 권리를 거꾸로 읽으면 이권이 된다. 즉 권리는 이권에 지나지 않는다. 권리라고 하면 고상한 말 같고, 이권이라고 하니 왠지 속물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한자어는 의미어로 두 글자의 순서가 바뀌어도 그 의미가 크게 훼손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권이란 무엇일까? 인권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권리들 중 도덕적으로 옳고,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일컫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된다. 그렇다. 사실 이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권리들 중 어떤 것을 인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해 끊임없는 논의를 오늘 이 순간에도 계속하고 있다. 숙의의 과정을 통해 어떤 것이 인권으로 인정받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느 정도 사회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기게 되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인권’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다. 사실 지금 말한 ‘인권’은 헌법에서 보장되는 기본권을 말한다.이(이런 헌법적 기본권은 인권의 범주에서 최소한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인권의 의미를 헌법적 기본권에 한정해서 사용하겠다.)

  “네 할 일을 다 하지 않았다면 밥도 먹지 마라.” 와 같은 말을 주위에서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마치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면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런데 과연 의무를 다해야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해서 선거할 수 있는 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저런 말을 쉽게 자주 들을 수 있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강하게 지배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저 말은 옳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경제학적 사고의 논리를 굳이 인권에 대입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소중하고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인권도 그와 같이 존중하라.’ 나만큼 남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당신 또한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내가 타인의 인권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타인도 나의 인권을 보장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인권이 달성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권을 고려치 않고 자신의 인권만 주장한다면 그 사회는 결국 어떻게 될까? 잠시 나의 인권을 보장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금세 각자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나아가 결국 나의 인권마저 지킬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소중한 나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인권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바탕이 될 때 비로소 친(親) 인권적인 사회가 가능해진다.

  인권은 ‘존중’이다. 학생들이 권리에 대해, 인권에 대해 더 많이 관심을 갖길 바라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회를 희망한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에 대한 ‘존중’을 갖추는 일이다. 학생들이 자신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상대는 주로 교사나 부모님일 수밖에 없다. 이 때 상대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싸워서 얻어내려고 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며, 오히려 하책에 가깝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는 일방적인 주장은 공허한 울림이요, 반감만 키울 뿐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상대방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른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나이가 어리다고, 직책이 낮다고, 후배라고 상대방을 낮추어 보지 말자. 학생들을 존중하자. 진심 어린 존중이 필요하다. 존대를 한다고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존중과 배려만이 상대의 마음을 열어젖힐 수 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최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었던 아픔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와 함께 한 편에서는 지나친 피해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차분하게 논의를 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세력과 이를 반대하는 집단 간의 혐오성 공격만이 오가는 모습이 아쉽기만 하다.

  혐오는 존중과 상반되는 표현이다. 혐오로 가득 찬 사회에 살길 희망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회도 학교도 똑같다. 존중이 우선되는 사회, 그리고 학교에 희망이 있다. 내가 속한 이 공동체가 좌절이 아닌 희망이, 혐오가 아닌 존중이 넘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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